플라톤의 저서들이 대략 40여 권이 되지만 진위가 가려져서 진작으로 분류된 것들은 대략 25권 내외이다. 대략 25권 내외라고 한 이유는 학자에 따라 달리 보는 점도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에서 많은 것들이 나왔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그의 대화편인 “크라틸로스”에서는 오늘날 논쟁의 핵심인 언어 논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두 인물이 나온다. 헤르모게네스는 언어 개념은 사람들이 약속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크라틸로스는 말이라는 것은 그것의 본질(eidos,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규약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자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헬라스 당시 두 흐름, 곧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변화의 철학과 피타고라스나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다.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는 전자를,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후자를 이어받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대주의와 절대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문제는 절대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보는 데 대한 반항으로 생철학이나 개인적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양상이 20세기 이후를 휩쓸기도 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절대주의란 것이 모든 세세한 삶의 양식을 절대적으로 규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바다가 있고, 또한 바다를 벗어나면 육지가 있다. 육지에는 많은 계곡, 강, 언덕, 산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 위에 뚜렷이 솟아 있는 높은 산이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도 무엇인가를 다양하게 보이게 하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희망이나 목적이 전혀 없다면 삶의 의미는 무의미하게 될지 모른다. 실제 삶은 많은 상대적인 것들 속에서 절대적인 그 무엇을 추론적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책들이 누렇게 바래고, 삭아져도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 당시 많은 상대주의자들은 오직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두 가지 무기를 중시했다. 하나는 정치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말이다. 만약 권력을 얻을 수 없다면 말로써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술(수사학과 웅변술)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말로써 승부하여 이기면 진리가 된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법으로써 저항하였다. 여러 지방을 여행했던 소피스트의 경험들을 삶의 자원으로 인정하더라도 그 경험들은 너무 산만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데아라는 절대적이고 참된 자체를 확신하고 가르쳤다. 후에 플라톤이 가진 이데아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정되고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면서 훨씬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학문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도덕형이상학의 기초놓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 그 법칙을 연구하는 것을 자연학(물리학)이라고 했고, 인간의 자유의 법칙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윤리학이라고 하였으며, 오직 선험적인 영역만 있는 사유에 대한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을 이론지, 실천지, 제작지로 분류하고 이 모든 분야에 관련되는 분야를 논리학(Organon)이라고 규정한 것을 칸트가 수용한 것이다. 칸트 역시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고 해서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경험되는 것들을 부정한 사람이 아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연결시키고 있음은 틀림없다. 루소의 "에밀"에서도 플라톤은 자주 언급된다. 루소가 자연주의적인 교육과 감각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계몽시대의 교육사상가였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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