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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 키에르케고르(4) 탐구

빈자무적 2025. 3. 11. 11:11
'죽음에 이르는 병'- 이 책이 지닌 의의

 

1.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과 죽음에 이르는 병

기독교 관점에서 죽음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실존 상황에서도 신으로부터 벗어나 절망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가난이나, 고통이나, 질병이나, 죽음마저도 신앙 앞에서는 죽음이 아니다. 이 책은 현대인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부딪혀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치유의 길의 보여 주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이성의 보편적 인륜을 주장한 헤겔에 대하여 통렬히 비판하였다. 극단의 반대편에 있는 마르크스 주의와 마찬가지로 헤겔 철학의 이성은 현대인의 자기 소외와 절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을 강력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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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죽음에 이르는 병’ 이 아니다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요,11:4).” 그럼에도 나사로는 죽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가겠다(11:11).”라고 한 말을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사로는 죽었느니라(11:4).” 물론 나사로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이적(11:40)”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이적, 그러므로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11:40)” 그런 이적을 그리스도께서는 염두에 두셨다. 오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병이 죽음 자체조차도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역시 참이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가 소리 높이 “나사로야 나오너라(11:43)”고 외치신 것으로 미루어,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부활이요 생명(11:25)”이신 그리스도가 단지 무덤에 가셨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가 거기에 계시다는 그 사실이 바로 이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또 나사로가 비록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만일 그 소생이 결국에는 죽음의 고통을 겪으며 종말을 고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나사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 분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소생이 나사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 아니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요. 그가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가 인간에게 죽음은 일체의 최후요, 도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생명이 있는 한에서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뜻에서 말할 때 죽음은 결코 일체의 것이 존재하고 있는 내부-즉,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서의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인간적으로 말해서 목숨이 있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또 그 생명이 건강과 힘에 넘쳐 있을 때에 있다는 희망보다도 훨씬 많은 희망이 죽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면에서의 죽음까지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이른바 지상적이며 세속적인 고뇌-즉 곤궁·질병·비참·가난·재난·고통·번민·비애·원한이라 불리워지는 모든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고통에 가득찬 것이며, 우리 인간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당자들이 “죽음보다 괴롭다”고 아우성칠 정도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설사 그것이 병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일지라도-결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닌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soren Aabye Kierkegaard ; Krankheitzum T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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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존상황과 구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왕위에 오르고 싶다. 그러나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나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 아니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기 자신의 약함에 절망한다.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여성적인 절망이라 불렀다. 남성적인 절망이란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끝까지 해 보려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그는 그 약함을 이겨내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약함의 자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절망에 이르게 하고, 구원은 보이지 않는다.

절망을 벗어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단 한 가지이다. 제삼자인 신 앞에 설 때 절망은 죄가 되고, 그 절망의 죄의식을 초월하려는 고뇌 속에서만 믿음이 생긴다. 이 믿음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만 인간성 회복과 구원이 있다.

 

3. 키르케고르에 대하여

 

덴마크의 철학자로 코펜하겐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1813년 덴마크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무역자유화와 산업주의로 이행하는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를 변혁시키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길드제도와 절대군주제에 의해 보수적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마르크스는 이 변화에 반역하면서 공산주의 개혁을 선언하고,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행위』를 저술하면서 종교적 선언을 한다. 당시에는 보편적 논리와 이성(理性)을 기초로 한 헤겔주의가 지배적 사상이었고, 이에 대항했던 인물이 마르크스와 키에르케고르이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로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에 의한 개혁을 외치는 자로서 서로 다른 극단에 선다.

 

그는 1843~18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반복(1843)', '공포와 전율(1843)', '불안의 개념(18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18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학적(美學的) 저작과 '철학적 단편 (18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後書)(18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고, 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했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해 강하게 공격하였다. 그런 와중인 18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 달 병원에서 사망했다.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0년대 초에 이르러 변증신학과 반합리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헤겔의 국가이성과 같은 집단주의 체제가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게 된 상황을 통렬히 비판하고 전쟁과 죽음, 기아, 고립, 소외에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주체성의 회복에 있다고 하였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24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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