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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 키에르케고르 탐구(2)

빈자무적 2025. 3. 11. 11:07
'죽음에 이르는 병'은 크게 2부로 나뉜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다소 어렵습니다. 이 문서의 앞의 포스트를 먼저 읽으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제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절망은 정신적인 병이며 자아의 병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정신이 절망 속에서 자아를 갖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轉義的인 절망:외부로부터 전이되어 자아의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간은 정신이다. 그러면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아이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이를테면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그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아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렇게 볼 때 결코 인간은 아직 자아가 아니다.

→ '인간은 자아가 아니다'는 말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냥 통칭해서 부르는 모든 인간의 범형을 두고 말합니다. 이때 자아가 아닌 이유는 진정한 '자아'는 자기 자신과 내적인 관계, 상황에 직면해서 누구와 바꿀 수 없는 독립적이고 정신적인 자기를 확립했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와 실존적이고 정신적인 주체로서 존재는 대립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앞의 인간은 주체성이 없는 인간, 뒤의 자기는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아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의 관계는 부정적인 통일로서의 제삼자이다. 양자는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관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서로 관계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정의(定義)에 있어서는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 역시 한 관계이다. 이와 반대로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게 되면, 이 관계는 긍정적인 제삼자가 된다. 이것이 자아이다.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그 관계가 타자에 의하여 정립되는 경우, 이 관계는 제삼자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제삼자로서, 다시금 그 모든 관계를 정립한 그것과 관계하는 또 하나의 관계이기도 하다.

→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 존재는 주체적이고 실존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생되어 정립된 관계가 인간의 자아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며, 또 자신과 관계하면서 타자와 관계한다. 이 때문에 본래적인 절망의 두 형식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가 자신을 스스로 정립하였을 경우, 거기에는 다만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형태만이 문제된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형식과는 관계가 없다. 즉, 이 형식은 전체 관계[자아]에의 예속(隸屬)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아가 자기 자신에 의하여 평형과 안정을 찾거나 혹은 그러한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그 전체 관계를 정립한 그것과도 관계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절망의 제 2형식(자신이 절망하여 자아이기를 원하는)은 다만 특유한 일종의 절망이라고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모든 절망이 그 속에서 해소되고 거기에 귀착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절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그에게 주어지는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로 절망에 대하여 분별있게 말을 하고(마치 현기증에 시달리며, 머리를 억누르는 짐이 있는 듯 신경질적인 착각을 일으키거나 혹은 자기의 머리 위에 무엇인가가 내려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실은 그 무거운 짐, 그 압박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에 대한 반사작용이다)―이제 모든 힘을 다하여 자기 스스로, 오직 자기의 힘만으로 그 절망을 제거하려는 절망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절망 속에 빠져 있게 되며, 그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깊은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뿐이다. 절망의 불균형은 결고 단순한 불균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고, 또 미지의 타자에 의하여 정립된 한 관계에서의 불균형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그 관계 내에 있어서의 불균형은 동시에 이것을 정립한 힘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반영된다.

이것이 절망이 완전히 근절될 때의 자아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식이다. 자아는 스스로 자기 자신과 관계하고, 자아가 되길 원하는 상태에서 자아를 정립한 힘 속에 그 근거를 둔다.

 

→ 파생되어 정립된 관계는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집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와 관계하려는 것이겠지요. 이 대립하고 양극적인 특성에 의해 지배받는 절망의 형태, 역시 두 가지 방향으로 가게 된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이 절망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지의 타자에 의하여 정립되는 절망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균형 상태에 있게 마련입니다.

 

[B] 절망은 죄이다

 

죄란 <인간이 신 앞에서, 혹은 신의 관념을 가지고 절망적으로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것, 또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강화된 약함, 혹은 강화된 고집이다. 즉, 죄는 절망의 강화이다. <신 앞에서> 혹은 신의 관념을 갖고 있다는 데에 강점이 있다. 죄를 변증법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법률가가 <정상가중적(情狀加重的)>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신의 관념이다.

이 제 2편, 특히 1항에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서술을 할 여지도 없고, 또 자리도 아니지만, 여기에는 절망과 죄 사이의 변증법적인 한계영역으로서, 종교적인 것을 지양하는 시인의 실존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그것을 체면의 절망과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다만 신의 관념이 수반되고 있는 점에 있어서만 다른 실존이다. 그러한 시인의 실존은, 이 범주의 결합과 위치에서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가장 탁월한 의미에 있어서의 시인의 실존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관찰하면 <미학(美學)에 관계없이> 시인의 실존은 모두 죄이다. 존재하는 대신에 시를 쓰고 오직 공상 안에서만 선(善)과 참(眞)을 문제로 삼을 뿐, 실존적으로 참과 선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시인의 실존을 죄로 만든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시인의 실존은, 그것이 신의 관념을 스스로 갖고 있다는 것, 혹은 신 앞에 있다는 점에 있어서 절망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시인의 실존은 대단히 변증법적이므로, 그것이 죄라는 것을 막연하게 의식하게 될 때, 헤아릴 수 없는 변증법적인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시인은 매우 깊은 종교적인 충동을 가질 수 있으며, 그의 절망 속에는 신의 관념이 내포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신을 사랑한다. 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숨은 고뇌를 위한 유일한 위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뇌를 사랑하며, 그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이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그 확고한 점에 관해서만은 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성이 그의 고뇌를 제거해 주리라고 기대한다. 여기 현세에 있어서 그는 그처럼 많은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일 결심을 할 수가 없으며, 믿음으로써 그 밑에 굴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신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일한 축복이다.

만일 그에게 신이 없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전율은 그에게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절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래, 어쩌면 무의식적이긴 하겠지만, 신을 있는 그대로의 신과는 약간 다르게 만들려고 한다. 말하자면 어린이의 유일한 소망을 무엇이나 들어주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와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여 불행을 맛봄으로써 시인이 된 사람처럼, 그는 이제 사랑의 행복을 높이 찬양하는 종교적인 시인이 된다. 그는 종교 때문에 불행해진다. 그는 이 고뇌를 버리도록 자신에게 요구되고 있는 사실을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갖고 그 밑에 굴복하고, 그 고뇌를 자기의 것으로 스스로 받아들이려는 것을 희미하게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고뇌를 자신으로부터 멀리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그 때문에 그 고뇌를 꼭 붙들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는(절망자의 말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이 말도 올바르게, 즉 반대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가능한 한 자신을 고뇌로부터 떼어 놓고, 한 인간에게 가능한 만큼 그 고뇌를 내던지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써 고뇌를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일을 그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인의 연애에 대한 묘사나 마찬가지로, 이 시인의 종교에 대한 묘사 역시 기혼자나 성직자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과 서정적인 감동을 지니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 또한 허위는 아니다.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의 묘사는 곧 그의 보다 행복하고 보다 나은 자아인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불행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그는 결코 신앙인은 아니다. 그에게는 신앙의 첫 부분, 즉 절망이 있을 뿐이며, 그 절망 속에서 그는 종교에 대한 불타는 갈망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의 갈등은 본래 이런 것들이다. 즉, 자신은 소명을 받은 사람인가? 몸속에 박힌 가시는 자신이 어떤 비범한 것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표시인가? 자신이 비범한 것으로 될 때, 그것은 신 앞에서 정상적인 것인가? 혹은 육체의 가시는 자신이 보편적인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 밑에 공손하게 굽혀야 한다는 것일까? 이것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나는 진리의 표현을 빌려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나는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가고 말이다. 자승(自乘 스스로 사사로운 욕망을 억누름)의 이와 같은 심리학적인 고찰에 어느 누구가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인가? 목사가 그리는 뉘른베르크의 그림종이가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그림종이들은 누구에게나, 심지어는 온 백성들에게까지도 근사(近似 정도가 유사함)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만, 정신적인 이해면에서 본다면 전혀 유사하지 않은 것이다.

→ 이 부분을 저도 설명을 잘하지 못하겠네요. 다만 인간의 절망이 한계상황에까지 이르러서 신 앞에서 지니는 두 가지 양향성,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마음과, 다른 하나는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각각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전자는 무신론으로, 후자는 유신론으로 나아가게 되겠지요.

※ 다음은 죽음에 이르는 병 - 키에르케고르 탐구(3)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정통한 손재준 선생님의 해설을 올리겠습니다. 제가 설명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쉽게 다가 올 것입니다. 일단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헤겔과 같이 객관적이고 보편론적인 합리주의에 철저히 대항하는 주체성의 철학자라는 점을 상기해 두면 이해가 더 빨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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