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델포이의 신탁
플라톤에 의해 종종 인용되는 델포이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말이다. 델포이는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국가적 성지였다.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 ‘법률’에 의하면 델포이의 신탁의 결정은 신탁을 필요로 하는 정치, 논증, 군사, 법률 등 모든 문제들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심판문(審判文)으로 작용한 것 같다. 델포이 신탁의 인용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 나온다. 파이드로스가 어떤 전설에 대해 물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이 신탁에 대해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것들을 믿지 않고 그 하나하나를 그 개연성에 따라 설명해 나간다면, 그는 투박한 지혜를 빌리는 탓에, 많은 여가가 필요할 걸세. 하지만 내겐 그런 일을 할 여가가 없다네. 여보게, 그 이유는 바로 이렇지. 나는 델포이의 석문(石文)대로 ‘나 자신을 알기’에 힘이 부치네. 이것도 모르는 처지에 낯선 것들에 대해 눈독을 들이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 우스운 일일 것일세. 그러기에 나는 그런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에 대한 통념을 따르면서 방금 말한 대로 그것들보다는 나 자신을 탐색한다네."
- 플라톤, '파이드로스'
소크라테스는 또한 ‘프로타고라스’에서도 델포이의 신탁을 인용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덕(arete)의 교육 가능성에 관한 논변을 담은 대화편이다.
"이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자기들이 발견한 지혜의 정수를 아폴론과 델포이 신전에 헌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너 자신을 알라!’,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게!’라는 경구인 것입니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델포이 신전의 경구를 잘 다루고 있는 책은 ‘카르미데스’이다. ‘카르미데스’는 절제를 주제로 한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도 절제 있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앞에서 한 말을 취소하고 내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겠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지식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이 점에서 델포이 신전에 헌정된 ‘너 자신을 알라!’는 현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만일 내 견해가 틀림이 없다면 이 말이야말로 신전에 들어온 자에 대한 신의 인사라고 할 수 있으며, ‘안녕하시오’라는 흔한 인사말보다는 ‘절제하시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나은 인사가 될 걸세. (중략)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절제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니까. 그런데 이 말이 곧잘 오해를 불러일으키네.” (카르미데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면 절제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글로 얻을 수 있는 책이 없으므로 플라톤의 말을 빌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앎‘ 의미는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아는 것들‘로부터 ’앎 자체‘에 이르는 진지(眞知)를 의미한다. 이 생각은 플라톤의 관점과 일치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많은 것들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아는 것들 중에서 타인으로부터 얻어 들은 것들,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들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를 의견(doksa, opinion)이라고 하였다. 의견은 상대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참된 앎이 아니다. 진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이 무지함을 깨달을 때 겸허하게 되고 절제하게 된다. 진지가 아닌 모든 추측, 현상, 오해, 억견 등 모든 것을 비우는 과정을 정화(catharsis)라고 한다. 카타르시오스(κᾶθάρςιος)는 배설을 뜻하며 독소를 제거하여 치료하는 의술로 사용되었다. 또 동사 카타리오(καθαίρω)는 ’체로 걸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지가 아닌 것들을 배설해버리거나 체로 걸러내면 남는 것이 없음을 아는 때에 무지의 자각이 일어나고 겸허하게 진지(眞知)를 탐구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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