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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삶과 앎(4) - 용감한 생애

빈자무적 2025. 3. 8. 10:58

4. 용감한 생애

소크라테스는 군인으로서도 용감한 삶을 살아 온 사람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1)와 다리우스 2세 재위 시대를 살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시기에 페르시아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시(431BC.-404BC.)에 소크라테스는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그냥 철학자가 아니라 매우 용감한 전사이었으며 앎과 삶을 일치시킨 실천가였다. 그가 전투에 참여한 것은 기록상 세 차례이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심포시온’, 크세노폰이 쓴 ‘메모라빌리아’에 그의 참전 내용이 나온다. 포티다이아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델리온 전투가 그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인 포티다이아 전투(432BC.)에서 알키비아데스 장군의 목숨을 구했다(심포시온). 델리온 전투에서 패배할 때 소크라테스는 최후까지 남아서 천천히 후퇴하며 적을 노려보았기 때문에 그를 당해 낼 적이 없었다(심포시온). 대화편 중에서는 암피폴리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언급한 것으로 ‘변론’에만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자신은 모두 세 번의 전투에 참가했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가 여러분이 선출한 지휘관들이 포티다이아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와 델리온 전투에서 제 위치를 정해 주었을 때, 그들이 정해 준 그곳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머물러 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으면서도……” (변론)

크세노폰은 델리온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면서도 그 공로를 양보했다고 썼다.

“그는 암피폴리스 원정에 참가했으며, 델리온 전투에서는 말에서 굴러 떨어진 크세노폰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퇴각할 때에도 그는 누군가 그를 공격할 것에 대비해 방어 태세를 갖춘 채 태연히 사방을 살피면서 참으로 침착한 태도로 유유히 후퇴했다. 그는 포티다이아 원정에도 참가했는데, 전쟁으로 인해 육로로 갈 수가 없어 배편으로 갔다. 어느 날 그는 밤새도록 마치 무언가에 결박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않고 진지를 지켜냈으며, 그 훌륭한 태도로 인해 받게 될 상을 알키비아데스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메모라빌리아)

포티다이아 전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BC.)2)의 서막이었다.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전투에서 돌아 온 뒤 보고하는 장면으로 이 책의 서두(序頭)를 장식한다.

“나는 엊저녁에 포티다이아 전선에서 돌아 와,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에 아주 편한 마음으로 늘 지냈던 곳들을 들러 보았네. 그러던 중 왕궁 맞은편에 있는 타우레아스 운동장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났네. 모르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네. 예기치 않게 들어서는 나를 보고 그들은 벌써 멀리 떨어진 데에서부터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더군. 그런데 카레이폰이 늘 그렇듯이 좌중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는 내 손을 잡고 말하더군.

‘소크라테스, 용케도 무사히 돌아왔군 그래. 여기 사람들은 방금에서야 비로소 그곳 소식을 들었다더군.’ 내가 그에게 대답했네. ‘보시다시피 무사하네.’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고 하더군.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 있었지.’ 그가 말했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일세.’ 내가 말했네. ‘자네도 전투에 참가했나?’ 그가 물었네. ‘그래, 나도 전투에 참가했지.’ ‘그럼, 이리 와서 이야기해 주게나. 우리는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거든.’

그렇게 해서 그는 나를 칼라이스크로스의 아들인 크리티아스(Kritias) 곁에 앉게 했네. 나는 자리를 잡고 나서 크리티아스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전투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그들이 던지는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했다네.‘ (카르미데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민주체제3)에서 평의회 위원이 된 적이 있었다. 이때 국민회의에서 해전에서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지 못한 10명의 장군을 한 번에 일괄 재판하여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분명히 불법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감옥살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의 편이 되어 이 결정을 반대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는 스파르타의 관대한 처분으로 아테네가 30인 자치정부를 설립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30인 위원회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4인을 귀빈관 직책으로 부여한 후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해서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당시 권력자 카레이폰 등이 30인 위원의 과두제에 연루시킬 목적으로 한 못된 짓이었다.

크세노폰의 ‘메모라빌리아’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평의회 위원이 되었을 때 그는 법에 위배되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했다. 그가 평의회 의장이 되어 있을 때 9명의 장군, 즉 트라실로스와 에라시니데스 및 그의 동료를 불법으로 처형하려고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투표의 진행을 거부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르기누사이 해전(407BC.)에서 아네테가 스파르타 함대를 이겼다. 전사자들을 정중하게 장사지내는 것이 아테네인들의 관습이었으나 전투가 끝난 뒤 강한 폭풍이 몰아쳐서 시체를 거두지 못했고 매장할 수도 없었다. 그는 법률에 반하여 장군들을 죽이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반대하였다.

1) (수정) 아닥사스다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의 셋째 아들로 '아하수에로'는 '아닥사스다'의 잘못 표기이므로 바로잡았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464-424BC)는 구약성서에 ‘아닥사스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에스라, 느헤미야 서에 등장하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선대 왕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의 셋째 아들이다. 반란 음모의 주동자로 알려진 형 다리우스를 죽이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을 종식시켰고 살라미스 해전 때 그리스 장군 데미스토클레스를 받아들여 후대하였으므로 너그러운 왕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대인에게도 너그럽게 대해 성전 건축을 적극 도우라는 조서를 내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전쟁, 431BC.-404BC.) 때 서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중립을 지켰다.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 난 후 10년이 지난 때(470 BC.)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났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여서 크세르크세스 1세(519BC.)~465BC.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끄트머리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1세(465BC.~424BC.), 다리우스 2세의 재위 기간(422BC.-405BC.)이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470BC.~399BC.)와 겹친다.

2) 펠로포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펠로폰네소스란 말은 원래 스파르타 지역으로서 낮아서 움푹한 곳을 뜻한다. 아테네가 이 전쟁에서 패한 후 스파르타의 후의에 의해 30인 자치 정부를 열 수 있었다. 카레이폰과 크리티아스 등이 통치한 이 30인 정권을 과두정부라고 한다.

3) 페리클레스 시대(460BC.-429BC.) 30년 기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