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말]
도가 사상가, 상대주의 논증, 우언(寓言)과 중언(重言)을 통해서 개인의 절대적 자유의 경지를 강조하였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소요유>와 <제물론>은 장자의 사상이 잘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장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에 장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莊子)는 몽(蒙)사람인데, 이름은 주(周)이다. 주는 일찍이 칠원(漆園)의 관리가 되었는데, 양(梁)혜왕(惠王)·제나라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였다. 그의 학문은 매우 넓어서 엿보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그 근본은 노자의 가르침에다 두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가 10여만 자나 되었지만, 대개는 노자의 가르침에다 자기의 설명을 덧입힌 우언(寓言)이었다. <어부(漁父)>·<도척(盜跖)>·<거협(胠篋)>과 같은 글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가르침을 밝혔다. <외루허(畏累虛)>·<경상자(亢桑子)>와 같은 편들은 모두 빈 말이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말을 잘 분석하고 연결하며 사례를 지적하고 인정을 유추하여,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다. 비록 당시의 석학이라 하더라도 그 공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의 말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걸림도 없이 분방했으므로, 왕공·대인들로부터는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지 못했다.
초나라 위왕(威王)이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사자를 보내어 많은 예물로 대우하고, 재상을 삼겠다고 알렸다. 그러자 장주가 웃으면서 초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천금이라면 큰돈이며, 재상이라면 높은 벼슬이다. 그대는 교제(郊祭)에 희생으로 바치는 소를 보지 못했던가? 몇 년 동안 먹이고 수놓은 옷을 입히지만, 끝내는 태묘에 제물로 바쳐진다. 그때가 되어 하찮은 돼지를 부러워해봐야 어쩌겠느냐? 그대는 빨리 돌아가고,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차라리 시궁창 속에서 스스로 유쾌히 놀며 살지언정 임금에게 얽매인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유쾌히 살겠다.” - ‘사기열전 제권’
이를 통해서 보면 장자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그의 논설을 펴는 사람이었으며 그 사상의 원천은 노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자가 무위자연의 도를 함축적으로 제시한 데 대해 장자는 그 가르침을 우언(寓言)을 통해서 사람들이 쉽게 무위자연의 도를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자는 노자에 비해 자연성 그 자체에 절대성의 옷을 입혔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분란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지닌 가치나 사고, 지혜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경고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상대적인 지혜를 옳다고 주장할 때 다툼이 일어나고 권력의 층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 말은 가치론적으로 상대주의의 절대화, 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옳다.’라는 생각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인위적인 것들은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장주가 꿈에서 본 나비를 깨어서 생각하니 나비가 현실이고 장주의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라고 탄식한 것은 바로 인간 세계의 상대적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장자는 모든 인간이 지니는 상대적 가치를 극복한 절대자유의 정신에 이르는 세계, 곧 만물평등의 경지에 이르는 제물(濟物)을 강조하였다.
또 사마천은 태사공의 입을 빌어 노자, 장자, 신자, 한비자를 비교하였다. 노자가 귀하게 여긴 도덕은 허무하고, 장자가 분방하게 논한 것은 결국 노자가 말한 대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으며, 신자는 도덕을 명실에 비추어 스스로 베풀었고, 한비자는 먹줄을 긋는 것처럼 법을 시행하였다고 하였다. 노장사상은 유가사상이나 법가사상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유가는 예의도덕을 실천하기를 강조하였고, 법가는 권력과 무력으로 다스리기를 주장하였으나 유가와 법가의 정신은 모두 인위적이고 억지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옥죄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서 ‘장자’의 내용 소개]
한서 예문지에는 ‘장자’는 52편이었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10여만 자로 남겨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모두 33권 33편이고 글자 수를 보아도 10만 자에 훨씬 못 미친다. 그중에서도 제28편(양왕), 제29편(도척), 제30편(설검), 제30편(어부)는 장주의 작품이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장자 자신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 낸 제1편 소요유, 제2편 제물론, 그리고 명편(名篇)으로 알려진 제17편 추수 중에서 일부분을 소개한다.
‣ 붕새와 메까치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변해서 새가 되니 붕(鵬)이라고 하는데 이 붕새의 크기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새가 한 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를 말한다. (중략)매미와 메까치는 이를 비웃는다. ‘우리는 훌쩍 솟아올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려 해도 때로는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어째서 구만 리나 올라가서 남쪽으로 가려고 하는가?’ (중략)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단명하는 이는 장수하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 ‘제1편 소요유의 <1>’
*곤(鯤)은 물고기의 알을 뜻한다. 물고기의 알은 매우 작다. 이에 비해 붕(鵬)은 매우 큰 새다. 붕이 한 번 날갯짓을 치면 회오리를 타고 수만 리를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졌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 된다. 상대적인 것의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 것이 없으며 자연의 지혜는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곤이 붕이 되는 것을 통해서 작은 것이 반드시 작은 것에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변화하는 가치관에 대해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각각 다른 삶의 방식
사람이 습기 찬 곳에서 자면 허리를 앓아 반신불수가 되어 끝내는 죽으리.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에 올라가면 몸이 떨리며 두려우니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세 가지 거처 중에 어느 것이 바른 거처인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은 소와 돼지를 달게 먹고 순록과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나 가마우지는 쥐를 즐긴다. 이 넷 중에 어느 것이 바른 맛인지 누가 알겠는가? - ‘제2편 제물론의 <6>’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따뜻하고 건조한 온돌방에 몸을 지져야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지만 미꾸라지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미꾸라지는 습기가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고 사람은 습한 곳에 살면 병이 난다. 인간과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면 각자의 삶의 방식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호접몽(胡蝶夢)
전에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여서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뒤에 문득 깨어 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물화(物化)라고 한다. - ‘제2편 제물론의 <6>’
*물화(物化) : 사물의 변화, 만물 유전
사물은 변화한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도 상대적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강물은 흐른다.’는 명제를 통해서 상대주의 진리관인 ‘만물유전’을 주장하였는데 장자의 사상도 같은 궤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에는 변하지 않은 로고스적인 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오늘 발을 담근 물은 어제 담근 물과 다르지만 그 물이 흐르고 있다는 변함없는 사실에는 불변의 로고스적 사유가 들어 있다. 장자도 역시 변하는 가치와 지혜를 벗어나 도달하는 절대 자유의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제물의 논리에는 만물평등의 불변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 자연이 지닌 지혜의 광대함, 정저지와(井底之蛙)
북해의 신인 약(若)이 (하백에 대해) 말하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井底之蛙)가 바다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시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비뚤어진 선비가 도(道)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예교의 속박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강가의 사이에서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더불어 위대한 도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소. (중략)
하백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가 귀하다는 것이오?”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도를 아는 자는 반드시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 있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자는 사물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도 밝은 법이며, 사물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 밝은 사람은 사물에 의해 자신이 해를 받는 일이 없소. (중략)
(하백이 물었다.) “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하오?”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소나 말이 네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 하고, 말머리에 굴레를 씌우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 하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 되고 지혜로써 천명을 손상시켜서도 안 되며 명성을 위해 자기의 덕을 희생시켜서도 단 된다고 한 것이오. 삼가고 지켜서 잃지 않는 것, 이것을 가리켜 그 진실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오.” - ‘제17편 추수의 <1>’
* 이 부분은 장자의 사상이 노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자는 노자의 함축적인 글을 우언을 통해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절대적 지식과 상대적 지식, 조삼모사(朝三暮四)
사람들은 정신이 하나 됨을 추구하려 애쓰되, 그것이 본래부터 하나임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 하거늘, 그렇다면 조삼이란 무엇인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면 어떻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마”라고 말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명분이나 실제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를 내게 된 것 역시 그와 같은 주관적인 심리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의 논쟁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균형[天鈞]속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그것을 일러 양행(兩行: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원만하게 어울림)이라고 한다. - ‘제2편 제물론의 <3>’
* 사람 사이에서 시비를 가리는 논의는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그 대립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은 상대적이다. 자기만이 옳다고 여기는 데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 자신의 지식이 상대적임을 알고 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절대 자유의 경지(物我一體)에 도달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누릴 수 있다.
[맺음말]
장자가 추구한 것은 좌망, 심재와 같은 수련을 통해서 제물, 곧 만물평등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제물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물아일체의 사상이다. 제는 가지런함, 곧 평등을 뜻하고 물은 자연을 뜻한다. 물아일체의 궁극적 경지에서는 일체의 시시비비가 없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동등하게 본 것이다. 장자는 어떤 면에서 보면 실존주의자 같기도 하고, 소피스트 같기도 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 같기도 하고 보헤미언 같기도 하면서 범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볼수록 아리송해지는 신비주의적 사상가다. 도가사상가에는 노자와 장자 외에도 열어구가 있다. 도가 사상서에는 대표적인 것이 세 권이 있는데 ‘노자’ ‘장자’, 그리고 ‘열자’가 그것이다. ‘열자’의 저자는 열어구(列禦寇)인데 열자의 저자로서 의심을 받는 형국이고, 심지어 열어구의 실존 자체까지도 의심을 받는다. 하지만 대체로 노자와 장자 사이에 존재했던 인물로 인식되는 편이다. ‘열자’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정리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도가사상은 노장사상의 다른 이름이며, 도교는 도가사상과 성격이 많이 다른 편이다. 물론 도교 역시 노장의 영향을 받았지만 도교는 종교적 색채가 짙다. 중국의 일반 가정에서는 불교보다 도교를 믿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인들의 장수(長壽)에 대한 염원이 큰데 이런 염원을 잘 반영하는 것이 불로장생을 꿈꾸는 신선(神仙) 사상이다. 신선 사상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진시황이었고 그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러 신하들을 각지에 파견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도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양생술(養生術), 오두미교(五斗米敎), 황로학(黃老學) 등이 있다. 도가사상의 문학작품은 많다. 도가적 이상향을 그린 콘웨이의 작품 '잃어버린 지평선'은 고전이 되어 왔고 아류작도 많이 출현했다. 잘 알려진 영화 아바타(AVATAR)도 도가적 제물 사상이 근저에 담겨 있다. 하지만 샹그리라 이름으로 낸 일본인 작가 이케가미 에이치의 소설 '샹그리라'는 '과학소설'로 도가적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도가,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신비주의적 작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바로 국내 작가인 이외수 씨이다. 그의 작품이 많이 있으나 가장 도가적 신비주의가 강하게 풍기는 것은 '벽오금학도'와 '황금비늘'이다. 이 외에도 '들개', '칼', 꿈꾸는 식물' 등도 상상력과 탄력 있는 구성, 감칠맛 나는 서술로 세계에 어디 내 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이외수 같은 인물이야말로 노벨문학상감이라고 생각한다.
또 도교의 성격이 현대에 미친 것으로 단전호흡, 기공수련, 태극권 등이 있다. 하지만 도교는 종교로서 내세관도 신관도 빈약하여 종교로서 의미가 약하지만 범신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페이지이므로 도교적 성격에 대해 세세하게 쓰지 않는다. 지면도 부족하거니와 다른 주제로 독립시켜야 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참고한 책]
장주, ‘장자’, 조관희 역해(청아출판사)
열어구, ‘열자’, 김학주 역(연암서가)
사마천, ‘사기열전’, 사기열전 강독회 역(청아출판사)
박효종 외, ‘윤리와사상’(교학사)
박순애, ‘중등 독서 교육에서 장자 우언의 활용 방안’(석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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